저자: 정원찬
정가: 14,000원
사양: 신국판 무선 / 312쪽
출간일: 2019년 5월 15일
ISBN: 978-89-8477-669-2 03810
계유정난. 세조가 정권을 잡은 그날이다.
조선의 모든 병권을 수하에 두고 있는 김종서를 두고 수양대군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외쳤다. 김종서 한 명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조선은 나의 세상이 된다. 어둠이 깃들 무렵 시작된 역모는 다음 날 새날이 밝아오자 마무리되었다. 수양 대군이 조선을 품에 안는 순간이었다.
5백 년이 지난 뒤, 1979년 12월 12일 저녁. 닮은꼴 역모가 전두환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만 잡으면 된다. 전두환은 그를 따르는 하나회 무리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정권의 찬탈은 군사의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만 잡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그들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내가 아니면 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며…….
세조가 했던 말을 전두환도 똑같이 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단종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전두환도 신군부에게 저항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했다.
나쁜 짓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도 배운다고 했던가. 두 역모 사건의 닮은꼴 역사를 보며 변명만 있을 뿐 반성이 없는 두 역사를 고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경혜공주의 삶이었다.
경혜공주.
그녀는 아버지 문종이 살았던 딱 그 나이(39세)만큼만 살다가 죽었다. 단종을 지키고, 남편을 지키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 아들 정미수가 그녀의 대소변 수발까지 했다. 그것이 비운의 공주가 누린 마지막 행복이었다.
단종이 권력을 빼앗기고 쫓겨났듯이 신군부에 의해 최규하 대통령도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가 물러났다. 5백 년의 닮은꼴 역사를 모두 다루고 싶었는데 욕심이 앞서 계유정난으로부터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원고를 모두 채우고 말았다. 그래서 12·12로부터 희생된 사람들의 삶은 다루지 못하고 말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차례
원손이 태어나던 날
그대를 만나
그리움은 꽃잎 되어
어의 전순의
먹구름은 비를 품고
부엉이 소리가 무서워요
생일잔치는 무르익어 가고
떠나가는 사람들
텅빈 뜨락에 바람이 불어
청령포에서 지는 해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바람아 불지 마라, 꽃잎아 지지 마라
서평
기해년 황금돼지 해의 벽두에 정원찬 작가의 역사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를 만났다. 우선 상당한 분량의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혔다. 그만큼 작가의 문체가 매끄러워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사건을 엮어 나가는 솜씨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의 정변에 휘말린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삶이 안타까운 여운으로 남는다. 어떻게 보면 소설은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작가는 티끌 같은 세속잡사에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또 분노하면서 늙고 병들어 마침내는 죽어갈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왕의 딸, 경혜공주의 마음을 짚어내는 작가의 탁월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역사소설의 경우, 마땅히 참고할 만한 문헌이 아직도 80여 년 전에 나온 루카치의 『역사소설론』(1937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근대에 들어서서 매년 압도적인 분량의 작품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 대한 이론적인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소설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역사소설을 일반적인 장르문학(추리소설이나 SF소설 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본격문학으로 온전히 분류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한마디로 역사소설을 본격소설의 본류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소설에서는 작가적 노력에 의해 획득되어야 할 소재의 객관화가 역사소설에서는 그냥 주어진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소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적 재미’와 관련된다. 역사소설에서 ‘이야기적 재미’는 작가와 서술 대상(소재) 사이의 거리에 있다. 즉 지나간 과거는 작가에게 그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부여하여 작가로 하여금 자신이 쓰는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다른 측면에서는 역사물의 이야기적 재미는 무엇보다도 작가나 독자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작가든 독자든 혹 접근함으로써 생길지 모르는 혼란에 대한 부담 없이 이야기에 대해 초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삶을 일정 정도 구속하는 역사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소비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원찬 작가의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는 역사물의 이야기적 재미를 제공하고 있는 소설이다.
흔히들 역사소설의 목적은 시대의 문제를 요약하고 있는 개인의 운명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소설은 서사물의 총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폭넓은 역사적 현실을 포괄해야만 한다. 루카치는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을 헤겔을 빌려 ‘세계사적 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소설의 주인공이 반드시 ‘세계사적 개인’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소설의 주인공은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보다는 중간적 인물 내지 중도적 인물이 더 적합하다. 그래서 그저 평범한 필부필부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 양상이나 민중적 삶을 포괄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전형적> 인물의 창조가 성패를 좌우한다. 이 소설 속의 경혜공주는 그런 인물이다.
역사의 운동은 자연의 그것처럼 스스로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에는 필연성과 더불어 우연성과 가능성이 함께 작용한다. 자유와 필연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간이 만드는 변화의 정경이 역사이다. 이 운동의 주체인 인간은 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역사는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간과 세계(자연)는 대립하기도 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합리성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니, 역사적 세계는 불투명하다. 역사는 오히려 주체와 객체의 운동이 빚어내는 승리와 패배, 성취와 좌절, 전진과 역행이 교차하는 마당이다. 제대로 된 역사소설을 만날 수 없는 시대는 그만큼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대한 성찰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나간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겨냥한 발언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의 존재는 당대의 정신사를 주목하게 한다. 역사소설에 대한 관심과 논란은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과 역사의 운명에 대한 조명으로서의 지적 탐색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소설은 지나간 역사를 현실의 패턴으로 문학화하는 작업이다. 그중에도 일반 대중들의 ‘역사 감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쟁이나 정변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들에게 전쟁이나 정변은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의 구체적 전사(前史)’로서의 역사, 현재적 문제와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는 과거의 역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또 이를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소설은 어떻게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고 형상화하여 이를 ‘현재의 구체적 전사’로서 만들 수 있으며, 또 현재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역사소설이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이 문제를 두고 루카치는, ‘과거의 재현이란 과거의 사람들이 지녔던 언어방식, 사고방식, 생활감정을 연대기적으로나 아니면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복원하는 것도 아니요, 과거의 삶을 현대화시켜 과거와 현재를 동일화시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식의 역사 재현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옳게 파악하지 못한 역사 인식의 결과이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고, 또 현재를 인식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대상이긴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서술하거나 형상화할 때는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 인식과 맞지 않거나 모순을 일으키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엄연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표현되는 대상의 내적인 실체는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현재의 보다 발전된 교양은 그 대상을 표현하거나 형상화하는 데 일종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내용이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과거의 역사를 인식하고, 또 이것의 중요성을 가늠하는 데에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미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역사의 경향이나 움직임은 동시대인들에게는 미처 의식되지 않거나 아니면 그 역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은 어둠이 깔려야 비로소 비상을 시작하는, 헤겔이 말하는 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만 인식될 수 있거나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 대군이 김종서와 세종의 여러 대군, 대신들을 귀양 보내거나 제거하며 마지막으로 단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이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인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정권과 병권을 쥐고 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부재한 상황에서, 세종의 영특한 아들들은 세종 시대에 각종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 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 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수양 대군은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계략을 획책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김종서와 황보인, 민신 등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원래 안평 대군이 책사 이현로의 조언으로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자청을 했는데, 수양 대군이 세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 대군은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 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 계획을 서둘렀다. 거사일은 음력 10월 10일, 첫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수양 대군은 병력 동원이 가능했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하기로 하고, 자신은 직접 종 임운, 양정 등과 함께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신숙주, 최항 그리고 거사 당일 권람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수양 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김종서는 무방비 상태였고, 수양 대군은 종 임운에게 철퇴를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신호를 내리면 즉시 김종서를 내려치라는 명을 내렸다. 수양 대군은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고, 김종서는 들어가 담소하기를 청하나 수양 대군은 핑계를 대면서 주저하였고, 미리 준비한 유인용 편지를 김종서에게 전달한다.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 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임운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 동료들을 철퇴로 내리치니, 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자, 수양 대군은 안평 대군의 처벌을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안평 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정난공신 1등에 자신과 정인지, 그리고 사돈지간이었던 한확 등을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다. 수양 대군 자신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재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수양 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 태세를 굳혀갔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1455년 마침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계유정난에 희생된 사람들은 김종서 등 70여 명에 이르고, 그들의 열여섯 살 이상의 친자와 열다섯 살 이하 및 모녀, 처첩, 조손, 형제, 자매, 자식의 처첩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우리는 현대문학사에서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을 기억한다.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종과 문종을 모시던 수구파와 세조를 옹위하던 개혁파 사이의 다툼에서 희생된 단종의 슬픈 생애를 그렸다.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연대기 소설이다. 「단종애사」는 단종의 탄생과 성삼문, 신숙주에 대한 고명과 수양 대군과 권람의 밀의(密議)를 내용으로 하는 고명편, 수양 대군과 한명회가 김종서와 안평 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여 등극의 기반을 마련하는 실국편, 정인지 등이 단종의 선위를 전하여 세조가 등극하고 사육신이 죽음으로 충의를 바치는 충의편,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는 혈루편 등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수양」은 김동인이 1941년 『조광(朝光)』 64∼73호에 연재하였다. 흔히 이 작품은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와 비교된다. 그 이유는 같은 시기의 정치적 질서의 형성을, 사관(史觀)을 달리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어린 왕 단종을 정통 왕권으로 보고, 수양 대군의 찬탈로 왕권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비판적·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김동인은 수양 대군을 정치적 역량과 통치자로서의 정치이념이 확립된 위대한 인물로 이해하고 묘사하였다. 이광수는 군신지의의 도덕관에 비추어 정통 왕권을 문제 삼았고, 김동인은 정치 역량과 통치 업적을 주로 하여 역사 발전의 법칙성을 더 존중하는 사관을 보였다.
줄거리의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수양이 사례사(謝禮使)로 명나라를 다녀오는데, 이때 수양 대군의 아우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에워싸고 있는 김종서(金宗瑞)의 세력이 수양의 세력을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반역의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다. 이에 수양 대군은 그 세력을 모두 제거하게 된다. 나이가 어린 단종은 이 공포 분위기에 질려서 삼촌인 수양 대군에게 정권을 넘기게 된다. 이리하여 수양은 대권을 쥐게 되고 문화 창조와 그 창달(暢達)에 진력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재구성하여 보인다는 점에서 볼 때, 이광수는 역사적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데 반하여, 김동인은 거의 허구적 구성에 의존하였다는 차이를 보인다.
이광수와 김동인이 이른바 루카치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세계사적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계유정난에 얽힌 중간적 인물 내지 중도적 인물을 그린 작품은 아마도 정원찬의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가 그 첫 시도가 아닌가 한다. 작품의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계유정난으로 인해 왕족에서 노비로 추락한 경혜공주! 여섯 살에 동생 단종이 태어난 다음 날 산후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안평 대군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자란 인물이다. 세종의 막내인 영응대군 부인의 친정 동생인 정종(영양위)을 만나 결혼을 하지만, 신혼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아버지 문종이 39세로 승하하고 어린 동생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 대군은 권력의 공백을 이용해 종친의 어른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김종서와 맞선다. 의지할 곳 없는 경혜공주는 평소 문종을 가장 따르던 금성대군과 손을 잡고 단종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금성대군과 남편 영양위는 귀양을 가게 된다. 이에 단종은 숙부인 금성대군과 매형인 영양위를 살리기 위해 수양 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경혜공주는 남편의 유배지인 수원으로 가고, 이곳에서의 삶이 역설적으로 그나마 경혜공주에겐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 그 와중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고, 공주는 아이도 갖게 된다. 사육신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 가고, 영양위는 광주로 이배된다. 그곳에서 경혜공주는 아들 미수를 출산한다. 이 소식을 들은 금성대군이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고, 이어서 단종도 사사된다. 또 다른 역모에 몰려 남편 영양위도 능지처참을 당하고, 숙부에게 동생(단종)과 남편(영양위)을 잃은 공주는 어린 아들 미수와 함께 둘째를 가진 몸으로 순천의 관노로 쫓겨 간다. 공주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세조는 공주를 도성으로 불러올린다. “내가 너무 미안했느니라.” 죽음을 앞둔 세조가 경혜공주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경혜공주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비구니가 되어 속세를 떠난다.
작가의 후기를 보면, 정원찬은 수양 대군의 계유정난에서 전두환의 12·12 쿠데타를 연상하고 있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역사바로세우기, 과거사 규명, 적폐청산, 이런 정치 논리가 내 의식의 저편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옛것을 알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5백 년 동안 한 번도 숨을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중략)- 나는 계유년 어느 늦가을에서 숨을 딱 멈추고 말았다. 계유정난. 세조가 정권을 잡은 그날이었다. 조선의 모든 병권을 수하에 두고 있는 김종서를 두고 수양 대군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외쳤다. 김종서 한 명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조선은 나의 세상이 된다. 어둠이 깃들 무렵 시작된 역모는 다음 날 새날이 밝아오자 마무리되었다. 수양 대군이 조선을 품에 안는 순간이었다. 5백 년이 지난 뒤, 1979년 12월 12일 저녁, 닮은 꼴 역모가 전두환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만 잡으면 된다.”
끝으로 “문종대왕의 딸 경혜공주의 삶을 먼저 조명해 보고, 제5공화국에서 희생된 분들은 다음 기회에 기리고자 한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정원찬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주인공이 아닌 중간자의 삶에 주목하는 그의 역사관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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